제1화-1982년 이사하는 모습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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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익형 블로그에 개인적인 이야기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블로그 고수의 유튜브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제 블로그가 언제부터 수익형 블로그였던가요? 언제쯤 수익을 받아 볼 수 있을까요. ㅎㅎ

원래 블로그는 개인의 이야기가 주겠죠.  그래서 기억이 시간이 지날수록 잊히는 아쉬움에 개인적인 추억을 담은 이야기를 적어 보고자 합니다. 하지만 저와 동시대 분이라면 공감되리라 생각됩니다.

'1900년대의 추억을 기록하며 '일구의 추억'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지금 제1화로 1982년도부터 시작할까 합니다. 

 

1982년도 집 이사 풍경 

 

필자가 지금까지 이사를 꽤 많이 다녔는데 제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전 이사의 기억이 1982년입니다.

그때 경기도 광명시 옆 서울시 구로구 독산동에서 경기도 구리시 인근 서울시 동대문구 망우동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바로 서남쪽 끝에서 북동쪽 끝으로 이동을 한 것입니다.

지금은 독산동은 금천구에 속하고 망우동은 중랑구에 속합니다. 망우동은 망우리라고 불렸는데 공동묘지로 유명한 동네였습니다.

지금도 독산동에서 망우동까지의 거리가 차로 약 50분 정도 걸리는데 그때는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으니 한참 더 걸렸을 것 같기도 하고요. 어쩌면 차가 안 막혔을 테니 비슷했으려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1982

 

트럭 짐칸에 사람 같이 타던 모습 흔해 

 

그때 저는 6살이었는데 용달 트럭에 운전석과 조수석 가운데에 앉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트럭의 가운데에는 간이로 앉을 수 있는 평평한 공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당시에는 트럭 뒤에 짐을 싣고 빈 공간에 사람들이 앉아서 이사를 다녔습니다. 기억에 형이 자진해서 짐과 함께 뒤에 앉았던 것 같은데 어머니와 형이 탔던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지요. 뒤에 사람이 타는 것도 상상 못 할 일인데 초등학생이라니요. 그래도 그때의 상식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으니까요.

'상식은 진보를 합니다. 그렇기에 과거의 상식으로 그것이 옳다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지나오면 알게됩니다.'

이사뿐만 아니라 빈 트럭에 사람들이 많이 타고 다녔는데, 언제부터 이런 모습이 없어졌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다만, 약 15년 전 친구와 제주도 여행을 갔을때 묵었던 숙소의 주인장이 우리들의 여정을 묻고 나서 트럭 뒤에 태워준 기억이 납니다.

 

1982
Pixabay로부터 입수된 SuperBea님의 이미지 편집

 

생각해 보면 당시 저희 아버지께서 낡은 포니 자동차가 있었는데 굳이 트럭에 탔을까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하는데, 기억이 정확한지 확신은 안들지만 여러가지 추론을 해보면 어떤 이유로 아버지와 누나가 미리 가셨던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은 가족 누구에게 물어봐도 정확한 기억은 없습니다.

 

저는 차멀미가 있었던지라 이동 중 한참을 자고나서 이사 온 집에 도착해서야 깼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멀쩡한 정신으로 차창 밖을 보고 기억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그렇다고 기억을 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요.

도착한 새 집은 1층 구옥인데 마당 한쪽 화단에는 큰 대추나무와 사철나무와 가시나무 같은 나무가 몇 그루 있었고 마당 가운데에는 물 펌프기와 수도꼭지가 같이 있었습니다.

야외에도 재래식 화장실이 있고 마루는 나무 바닥으로 되어 대청마루처럼 미닫이 문을 열어 놓으면 마당이 보이는 집이었습니다. 집 밖으로는 도로가 아직 포장되지 않은 흙바닥 도로였습니다.

 

이웃 사촌이 선물한 종합과자 선물세트

도착하자마자 형과 저는 빈 방에 들어가서 살던 동네 이웃집 아주머니가 선물해준 종합과자 선물세트를 뜯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영상처럼 그때 기억이 납니다. 기대감에 매우 마음이 두근두근 거렸거든요.

이사 갈 때 이웃 아주머니들이 어머니와 손잡고 인사하며 아쉬움에 눈물을 훌쩍거리며 흘리셨던 같은데 어린 저는 어서 도착하면 선물세트를 뜯어봐야겠다는 생각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아들이 과자와 초코렛을 엄청 좋아하는 심정을 조금은 이해하게 됩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이 제가 어렸을때만 해도 교과서에 한국사회의 특징으로 이웃사촌을 들곤 했는데 지금은 참 무색한 말이 되어 버렸네요.

 

 

1982
포니자동차, 과자 종합선물셋트

 

이사 이후에 집안 정리한 것은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어느 순간 집을 정리했고 우리 집 가운데 방에 제가 새댁 아줌마라고 부르던 분이 사글세로 함께 지냈습니다.

남편 분은 사우디에서 일하신다고 했는데 사우디에서 가끔 오는 선물에는 제 연필과 지우개도 있었죠.

아주머니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어머니와 마루에서 얘기도 하시고 각자 집안일을 하시는데 보냈는데 어머니를 많이 도와주셨었죠.

그리고 어느 날 아저씨가 귀국하셔서 얼마간 같이 지내시다가 집을 구해서 이사 갔던 기억이 납니다.

한동안 인연이 이어져 그 후로도 오랫동안 소식을 주고받았는데 지금은 연락이 안 되니 궁금합니다.

 

가족이 다 같이 직접 하던 도배 그리고 자장면 

 

아무튼 그 당시에는 이사를 하고 나면 직접 도배를 하곤 했었죠.

가구와 짐을 한쪽 또는 공간의 가운데에 쌓아 놓고 나서 온 가족이 협동해서 도배를 했었죠. 아마도 그때도 이사 직후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도배를 하면 어머니는 밀가루로 풀을 쑤시고 아버지는 한쪽에 의자를 놓고 그 위에 도배지를 놓고 도루코 칼로 잘랐습니다. 자른 도배지를 차곡차곡 쌓아 쌓고서는 바닥에 깔아놓은 신문지 위에  놓고 한 장씩 빗자루로 풀을 발라놓습니다.

그리고 벽에 도배지를 붙이면 저희도 밑에서 잡고 삐뚤어지면 떼서 다시 붙이고 그랬죠. 벽에 신문지로 초벌 도배도 하니 신문지가 참 유용했습니다.

 

그때는 당연히 포장이사라는 것은 없었고 운전자 한분이 이사하고 같이 짐을 나르는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이사할 때는 아이들도 작은 물건을 나르고 했으니 저희는 초등학생이었던 형이 아버지와 가구를 함께 나르곤 했습니다.

저도 작은 짐들을 나르곤 했습니다. 이사를 하면 친척이나 지인이 와서 도와주곤 했었지요.

그리고 도와준 값은 잘해야 둘러앉아 먹던 짜장면 한 그릇이었습니다.  ( 저의 경우는 초등학교 때 친구네서 처음 얻어먹고 감동했던 기억이 납니다. )

 

 

1982
Pixabay로부터 입수된 709 K님의 이미지 입니다.

 

그때는 이사 전에 한참 전에 미리미리 짐을 싸놔 준비를 하곤 했습니다.

짐을 보자기에 싸며 저희 부모님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지금보다 더 좋은 집으로 이사 가면 뿌듯한 마음이 들었을 것인데 그때는 큰 집을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 올 때라 속상한 마음도 들었을 것 같군요.

가족 같은 이웃사촌과 헤어져야 하는 아쉬운 마음도 들 테고 새 동네에 대한 기대와 낯섦도 있겠죠.

 

그때 아버지의 나이가 지금의 저 보다 어렸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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