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80년대 초딩(국민학생)은 어떻게 놀았나? -저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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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오로지 80년대에 지금의 초등학교인 국민학교를 다닌 사람으로서 학교 생활과 놀이 중심으로 그때를 추억해보고자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아이들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저희 반에도 선생 교단 바로 앞에서부터 아이들이 앉기 시작해서 7~8줄 정도 4 분단 정도 됐으니까 한 반에 56명~60명 정도 됐던 것 같습니다. ( 분단이라는 말이 참으로 오랜만에 생각이 났네요. ^^)  

교실 뒷 공간이 별로 없을 정도로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서울의 학교는 그런 반이 보통 한 학년에 13~14반 정도 됐으니 한 학년에 600~700명 정도이고 6학년까지 있으니까 국민학교의 전교생은 대략 3,500명~4,000명 정도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아이들이 너무 많다 보니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같은 학교를 다녀도 한 번도 같은 반이 안된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는 같은 반이었는데도 잘 모르고 때로는 한 번도 같은 반이 아니어도 어떻게 알게 돼서 친해지는 경우도 있고 그랬습니다. 

이런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요즘 초등학교는 한 반에 20명 안팎이고 반도 몇 반 안돼서 한 학년 아이들은 거의 다 알고 지내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저희 때 같으면 인구가 적은 시골 학교 같은 분위기일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60대 중후반에서 70년대 초에 출생하신 분들의 숫자는 정말 상상 초월합니다.

이건 사회에 나가보고 나서 더 실감을 했죠.

제가 생각하기에 현재 60대 중후반 ~ 70년대 초 출생하신 분이 사회 곳곳 핵심적인 위치에 계신 듯합니다.   

 

 

80년대 초딩

 


아무튼 그렇게 학생이 많았던 관계로 국민학교 입학했을 때 2학년 때까지 오전반, 오후반을 번갈아 가면서 했었습니다.
그리고 3학년 때부터는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죠.

주로 콩자반이나 멸치볶음을 반찬으로 해주셨던 것 같습니다.

1~2학년 때는 기억이 많지 않습니다. 1학년 때 기억나는 것은 담임 선생님이 친누나 담임 선생님을 하신 적이 있어서 저를 특별히 잘해주셨는데 하루는 운동장에서 놀다가 넘어져서 울고 있는데 달려오셔서 안아주던 장면입니다.

다른 것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장면이 특별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마도 선생님의 따뜻함이 제게 인상 깊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린 시절 따뜻한 마음을 느낀 것이 몇십 년을 가는 것을 보면 어떤 아이라도 대할 때 좀더 잘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 2학년 때는 선생님이 너무 무서워서 화장실 가고 싶다는 말도 못 하고 참다가 바지에 실수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제가 커서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당시 제가 반장을 맡았는데 선생님이 어머니를 불러서 학교에 필요한 물품을 살 금전적인 지원을 요청하셨다고 하더군요. 어머니께서 형편이 안된다고 하니 선생님께서 반장을 잘못 뽑았다고 말씀하셔서 상처를 많이 받으셨던 것 같더군요. 그 때문인지 선생님이 제가 좀 차갑게 대하셨는데 다행히도 선생님은 특이하게도 학기중에 오랫동안 연수를 가셨고 다른 젊은 선생님께서 그 기간 동안 맡아주신 생각이 납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제게 임시로 오신 선생님이 방과 후 제 손을 붙잡고 문방구에 가시더니 그 당시 제일 색상이 많았던 크레파스를 사주셨는데 당황스러우면서도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랐던 기억이 나네요. 선생님의 긴 파마머리와 남방, 연한 청바지 등이 어렴풋이 생각이 나는데 성함도 얼굴도 기억이 안나는 것이 아쉽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하네요. 연수를 갔다가 돌아오신 선생님은 얼마 수업을 안하셨는데 제게 파격적으로 안좋은 성적을 주셔서 또 기억에 남습니다.


학교를 마치면 친구와 동네를 엄청 돌아다녔는데 지금은 문 닫았지만 그 당시 공사 중이던 그때 지명으로 서울 동대문구 망우동 용마산의 실외 수영장에 몰래 들어가서 미끄럼틀을 타기도 했습니다.
또 새로 건물을 올린 동네 교회인 금란교회에 가서 천장에 달린 조명을 떼려고 하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샹들리에 조명이 보석인 줄 알고 가져가려고 한 것이죠. 마치 은촛대를 훔치는 장발장의 마음으로 가슴이 콩닥콩닥했는데 결국 경비 아저씨한테 걸려서 손들고 서있다가 쫓겨난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너! 어느 학교 몇 학년 몇 반이야? 이름이 모야? 선생님한테 전화드릴까?" 하면 손을 싹싹 비비며 봐달라고 사정하던 시절이었죠.
서울이었지만 동네에는 조금 가면 논이 있었는데 지금의 망우동과 신내동 인접한 근처 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개구리와 올챙이를 잡는다고 남의 논에 들어가 헤집고 다니다고 멀리 몽둥이를 들고 뛰어오는 아저씨를 보고 도망친 기억도 납니다.
하루는 친한 친구가 성냥과 화약을 가져와서는 동네 산(망우리 공동묘지)에 가자고 해서 갔는데 군인들이 총을 들고 서 있더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방위병인지 예비군 인지 모르겠는데 그 군인들에게 화약을 던지고 도망 다녔습니다. 그러자 그 군인들이 혼내지는 않고 입으로 총소리를 내면서 우리들 놀이에 상대해 주었는데 오랜 훗날 제가 군대에 가서도 입으로 총소리 내며 훈련을 하다 보니 그 생각이 나더군요.
지금도 여전히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집에 오는 길에 긴 담배 하나를 주워서 친구네 집 지하실에서 불을 붙여 물어보았는데 매운 연기에 당황해서 바로 껐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만 해도 어른들이 방 안에서 담배를 피웠고 아버지 재떨이를 비우고 닦아놓기도 하고 담배 심부름도 수시로 할 때였는데 심지어 버스 안에서 승객도 의자 앞에는 재떨이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른들이 맛있게 피운던 담배가 9살짜리 남자아이들에게도 호기심을 발동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 당시에는 서울 변두리 곳곳에도 공터가 있어서 거기서 아이들이 불장난을 많이 했습니다.

 

3학년 때는 조별로 앉아 있었는데 점심 도시락을 먹고 나서 운동장에서 같은 조 친구들과 잡기 놀이, 다방구 같은 놀이도 하고 때론 운동장 둘레를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 나이 때도 리더십이 출중한 아이들이 있죠. 같은 조 남자 친구였는데 남, 여를 떠나 친구들 사이에서 이거 하고 놀자 하기도 하고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했던 기억이 납니다. 조근조근 재밌게 이야기도 하고 친구 이야기도 잘 듣곤 했죠. 지금은 이 친구도 아쉽지만 이름도 얼굴도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그러던 중 제가 이사를 가게 돼서 3학년 때 전학을 가게 되었죠. 전학을 간 학교는 인접한 동네의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가 조금 달랐습니다. 우선, 남녀 학생이 같이 노는 분위기가 아니었고 남학생들 사이에서도 좀 과격한 분위기였죠.
여학생들은 주로 고무줄놀이나 쎄쎄쎄 공기놀이 등을 했고 남자아이들은 여자 아이들 노는 고무줄을 끊기고 하고 여자 아이들에게 일명 아이스케키 하고 치마를 들어 올리거나 머리채를 잡아당기고 도망치기도 하고 말뚝박기 놀이를 하기도 하고 좀 정신이 없었죠.

전학을 와서는 주로 반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놀았는데 하루 종일 운동장은 전 학년 몇 개의 축구 시합이 동시에 진행이 되곤 했죠.

그래서 좀 어이없지만 축구 골대 앞에는 골키퍼를 보는 친구 친구들이 많게는 네댓 명이 서있곤 했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때문에 우리들은 공터를 찾아 동네 여기저기 다녔는데 형들이 많아서 학교에서 시합이 안되면 나무를 다 베어내고 채석을 해서 돌산이라고 불리는 뒷산의 공터에 가서 공을 찼습니다. 그곳은 한때 건축 자재로 쓰이는 돌을 채석하다가 멈춘 곳이었죠.

거기도 자리가 없으면 근처 개울가에 가서 가재도 잡고 댐도 쌓고 하면서 있다가 자리 나면 축구를 시작하곤 했습니다. 그곳은 거의 사람이 없는 곳이 없는 아이들의 아지터 내지는 놀이터 같은 곳이었는데 주로 우리 학년 아이들이 애용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때론 돌발 사고가 나기도 했습니다. 어른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거기서 싸움도 나기도 하고 때론 다른 곳에서 싸움이 나면 돌산에 가서 싸우자. 그렇게 가서 구경하는 아이들에 둘러싸여 대결을 하곤 했습니다.

사실 전학 온 제게 이런 것은 좀 많이 낯선 환경이었는데 그 와중에도 친구들은 여럿 사귀고 지금까지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좋은 인연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보면 나의 선택이든 아니든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과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은 나에게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이 공존하게 되는데 저의 경우 안 좋은 일은 나에 소중한 일과 인연을 필연으로 삼으로서 순수히 받아들이곤 합니다.

 

어린 시절은 주로 나의 결정보다는 부모님의 일과 사건과 선택과 결정에 따라 여러 일들을 겪게 되죠.

전학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좀 당황스럽고 적응하기 힘든 일이었는데 지금은 그로서 좋은 친구들이 남았군요. 

 

개인적인 이야기라 많은 분들은 공감 안되실 것 같은데 동시대,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들은 공감이 조금 되실 것 같기도 하군요.   

쓰다 보니 길어져서 초등학교 고학년은 따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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